_ 고산 박철수 재공_

우리 수석역사의 전통과 배경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때 돌을 애석하게 된 흐름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 흐름을 요약하면  

① 중국의 괴석을 주체로 영향을 받은 山水石 애석풍류

②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배석신앙에 따른 자생적인 애석 열기  

③ 불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애석풍토

 

첫 번째 우리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권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여 오는 동안 우리 나름대로의 환경에 적응되는 고유한 영역을 키워왔다. 그러한 중에 중국의 괴석을 누리는 기풍이 우리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주로 태호석(太湖石), 영벽석(靈璧石)을 흠모하는 가운데 산수석을 누리는 심오한 경지가 중국의 완석에 그 전통의 근간을 두게 되었다.

 

500년전 기록인 인제(仁齊)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서두에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삐죽한 봉우리는 가파롭고 험하며, 낭떠러지와 깊은 구렁을 이루었는데, 은은히 구름과 우뢰를 품고 있는 듯한 모양을 가졌다.” 라는 산수석에 대한 묘사는 중국의 고전 기록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표현은 중국의 서책을 배우는 사이에 익힌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고궁인 비원 내 낙선제의 어느 우람한 정석(庭石)을 살펴보면 한 쪽에 ‘입옥비운(立玉飛雲)’이란 글이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뜻은 ‘구슬처럼 고귀하게 우뚝 솟아난 봉우리 위로 구름이 걸쳐 흘러간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역시 중국의 맥을 이어받은 산수석의 의미를 단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완석을 주로 인용한 글이 우리의 고전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특히 미원장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애석담들을 널리 인용한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기풍이 정립되어 왔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제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화로 비슷한 분 가운데에 돌을 갖다놓으면 물기를 봉우리 위까지 능히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더운 낮에도 마르지 않으며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기를 띄운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나라 옛날의 독특한 애석기풍을 세웠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런 돌을 ‘香石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라 설파한 바를 염두에 둔다면 오늘날 처럼 돌에 물을 뿜어주지 않더라도 분 바닥에 고인 물을 저절로 빨아올리는 돌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완석 기풍은 아직 중국의 고전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

  

수반에 앉힌 산수석의 감상은 물을 뿜어주고 나서 바라보는데에 그 극치가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은 수석은 그 색깔이 선명하게 돋아나오고 치밀한 질감과 윤택함도 살아나와 감상하는 맛이 훌륭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날의 취향은 한국만의 창의적인 애석기풍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석은 오랜 세월 사이에 養石이 되어야 참다워진다.

 

수석에서의 양석이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과 같으며, 우리의 덕성을 기르기 위한 養德에 비유할 수 있다. 돌은 본래 생명이 없지만 수석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정신으로 완상하고자 하는 것이 양석이다.

  

이러한 양석에 대해서도 인제 강희안은 이미 설파하고 있었다. 저절로 물기를 빨아올린 돌에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겨나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양석인 것이다. 이끼가 생겨남으로 경년(經年) 변화에 의해 저절로 스며 나오는 고색(古色)의 유현한 느낌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500년 전에 지적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토속적으로 자생한 애석의 색다른 기풍은 배석신앙(拜石信仰)에 의한 발흥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기고(奇古)하고 신비한 돌 앞에 엎드려 부귀를 염원하고 가문의 번영을 기구하는 등의 소원을 비는 의식이 우리 민족에게 강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고 본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마을 근처의 어떤 바위에 대한 신비성을 이야기하며 두려워하기도 하는 원시적인 배석신앙의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듯 배석신앙은 돌과 바위와의 친화력을 갖게 하여 진귀한 돌이라면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기풍이 일반 서민들 가운데에 퍼지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커다란 바위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누각과 같은 다락집 형상을 갖춘 돌, 인체와 닮은 돌 등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은 모두 신령한 것으로 받들며 숭배하였다.

  

신앙적(샤머니즘)으로 돌과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어느덧 어떤 바위에 대한 신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찬사도 보내는 과정에서 완석의 정서가 생겨난 것이다.

 

그 한 예로 민화에서 괴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애석의 정취가 상류사회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민층의 저변까지 폭넓게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애석이 자연발생적인 현상임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돌을 애완했던 자취가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치는 사이에 도교의 노장사상이 혼입되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어느 종교이든 낯선 고장에 정착하려면 그 풍토 환경에 영합하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노장적인 자연애가 강하게 나타나는 불교의 성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기에 괴석과 같은 자연미에의 상찬이 승려들에 의해 굳혀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당(唐)에 가서 화엄경을 배워온 신라의 승려 승전법사(勝詮法師)가 80개의 돌을 관속으로 삼아 그 돌들을 향해 불경을 개강했던 것은 우선 ‘돌’이라는 자연을 아꼈기 때문이다.

 

충무 앞바다의 통영군 욕지면 영화도에는 400년 전에 연화도인(蓮花道人)이 모셔놓은 ‘둥근 돌’이 있다.

  

이 역시 자연이라고 하는 돌을 애착하였다는 한 예가 된다. 이 전래석인 ‘둥근 돌’은 불교적인 의미를 다분히 품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돌은 오늘날의 승려들도 좋아하여 사찰에서 자주 발견되는 돌이다. ‘둥근 돌’은 모가 없이 완만하고, 어떤 사물의 번거로운 형상이 없어 오직 평안함만을 풍겨주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둥근 것에서 찾으려 한다.

 

둥근 것은 ‘완전’의 표상이다. ‘둥근 돌’을 바라보노라면 무아의 경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무경(無無境)의 선(禪)으로 몰입된다. 또한 대우주를 보는 넓고 너그러운 감개에 젖는다.

  

자연과의 친화에 의하여 승려들이 예부터 둥근 돌을 비롯한 괴석을 좋아했던 기풍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선(禪)과 각(覺)의 대상으로 완상하는 기풍이 대중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혀가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자연애의 기풍은 여느 민족과는 달리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 비록 인공을 가했더라도 그 흔적이 감춰진 순수 자연의 본래 상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들 과거의 애석 풍토가 중국의 태호석, 영벽석 등을 중심으로 미원장 등의 산수석 예찬이 주종을 이뤄 영향을 받아왔음은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환경과 풍토에 맞는 우리다운 애석기풍이 특색 있게 나타나 있음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장차 현대 수석의 방향도 이에 맞추어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 전래된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3년)에 중국으로부터 축산법(築山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이때부터가 우리 선인들이 정원을 석가산으로 자연축경을 꾸미면서 돌에 대한 매력과 흥미를 느껴 수석수집 취미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고려로 내려와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많은 풍류를 보고 목화씨를 담뱃대에 숨겨 온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이 애석하였는바 그 실증으로 경남 산청군에 소재하고 있는 선생의 사당(祠堂)에는 지금도 많은 괴석(怪石)과 기석(奇石)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명한 문인들과 승려들에 의하여 애완되어 왔다. 홍만선(洪万選)(1664~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수석의 이끼를 배양하는 방법과 석창포와 돌의 산지를 소개했다.

  

김영황(金永晃)의 친필로 된 <예석기(禮石記)>에 수석의 첨경 그리고 수석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김영황(金永晃)은 분성(盆城) 사람으로 자는 주향(周鄕), 호는 단계(丹溪)이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문하생이었다.

  

단계는 시서화에 능했고 가야금을 잘 타는 풍류인 이었다. 단계는 애석하게도 30세에 요절하였다 하니 어찌 그리 수명이 짧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단계의 글씨에서 추사가 애석해했던 자취가 뚜렷이 남아있다.

  

단계는 ‘해석연산(海石硯山)’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돌은 옛날에 궁중에서 진기하게 소장했던 유래석(由來石) 이었던 것이다. 이 돌이 당계의 손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기록하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김교각(지장보살), 다산, 완당, 초의대사 뿐만 아니라 문인묵객에서 궁중에 이르기까지 애석했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우리나라의 각계각층의 선비들이 그리고 더 아득한 선인들도 애석하여 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茶山 정약용(丁鏞)(1762~1863)이 말년에 강진으로 귀양 가서 스스로 탐석한 돌을 완석하였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돌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과 행적이 남아있다.

  

추사(秋史)가 쓴 <천하괴석(天下怪石)>, <수석노태지관(壽石老笞池?)>, <산수석(山水石)> 등 천하명필이 지금도 탁본이나 사본 그리고 서각으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얼마 후 강추금(姜秋琴)이 선인들의 전통을 이어 문방오우(文房五友)로서 돌을 애완하면서 ‘30년에 걸쳐 괴석을 모으니 책상머리에 무수한 명산들이 우뚝 솟았구나.’라고 하며 감격하였다.

  

옛 선비들이 무아의 경지에서 세월이 담긴 돌 하나를 문갑 위에 놓고 태초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풍류는 신선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었으며 이 기품을 사랑하여 문방(文房)의 제 오우五友)이자 제오군자(第五君子)로서 애석해 왔던 것이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오우가(五友歌)>에서 읊었듯이 이 수석(水石)과 송죽(松竹) 그리고 달의 다섯 친구면 지금도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일본고사에 의하면 수석이 우리나라부터 이웃나라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백제시대의 근륵(勤勒)이란 승려가 일본 수이꼬천황(推古天皇) 20년(612년) 영산석(靈山石)을 일본조정에 헌납한 것이 일본 수석의 효시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 애석의 값진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제(仁齊) 강희안(姜希顔)(1417~1464)의 <양화록(養花錄)>은 지금부터 약 5백 년 전의 기록임에도 괴석에 대한 감상과 연출기법 등을 상세히 적어 놓은 보배로운 책이다.

  

‘괴석은 곧 굳은 덕을 지니고 있으며 참으로 이것은 군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라는 괴석 예찬도 아끼지 않았으며 세조 때의 서화가로 훌륭한 괴석도(怪石圖)도 많이 그렸다.  그의 「양화소록(養花小錄)」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장식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숨어있는 듯한 국화와 높은 품격을 지닌 매화와 더불어 난초의 상서롭게 풍기는 향기 등 여러 종품(種品)은 제각기 풍류와 운치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창포(菖蒲)는 홀로 세속에 초연하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차가운 지조가 있으며, 괴석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 항상 같이 하여 눈에 담고 마음으로 본받을 것으로서 모두 버릴 수 없는 감히 미치지 못할 고상한 형식이다. 그들이 지닌 바가 나의 덕이 되는 것이므로 정신적으로 유익하고 도움이 됨이 어찌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 뜻이 어찌 넓고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널다란 집에 보드라운 융단을 깔고 비취 구슬을 몸에 차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부르는 따위에만 마음과 눈이 어두워지는 행실은 충분히 엄준한 징벌을 받을 만하다.”

 

또한 우리의 옛 동양화에서 선조들이 남긴 허다한 괴석도(怪石圖)는 선비의 애석 자취를 넉넉히 반영해주고 있으며, 분(盆)에 올려놓은 괴석을 방안에 배치한 고화(古畵)도 발견되고 있다. 또 서민층에 널리 퍼져있던 민화 속에서도 애석하여온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이 돌의 운치를 귀히 여겨 아끼고 사랑한 격조 높은 피가 오늘날 우리들 몸속에서도 흐르는가 보다. 지금도 고궁에 가면 품위 있고 기품 있는 기석(奇石), 괴석(怪石)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창경궁(昌慶宮), 장서각(藏書閣) 앞, 창덕궁(昌德宮) 낙선제정당(樂善齊正堂) 뒤와 장락문(長樂門) 앞 등엔 돌 화분에 세워진 기석(奇石)들이 옛 사람들의 얼을 간직한 채 묵묵히 예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돌의 산지와 연대 그리고 유래 등을 기록한 문헌이 없어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궁중에서도 돌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으로 흐뭇함을 금치 못한다.

 

‘돌의 맛, 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시인 조지훈은 못을 박기도 하였다.

  

추상석(抽象石)에 심취한 시인 박두진은 스스로 탐석한 돌에서 시상을 얻어 쓴 <수석열전(水石列傳)>이라는 돌 시집을 펴놓았다. 돌은 선비들의 애완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길흉을 점지해주는 영험한 암석으로 숭배하기도 하고 때로는 건축재로서, 석공예품으로서 다양하게 항상 우리 인간과 함께 인간의 곁에서 공존하였다. 

 

선인의 슬기가 가득한 <채근담(菜根潭)>에서 말하기를,“풍취를 얻는다는 것은 많음에 있지 않다. 작은 못, 작은 돌 하나에도 고요한 산수의 경관이 담긴다. 빼어난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오막살이 초가에도 시원한 바람, 밝은 달이 있다.”

 라고 했듯이 아주 작은 것에서 크고 풍요로운 것을 얻는 풍류가 곧 축경미의 극치로서 수석 취미의 보람을 갖게 한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수석 취미를 조용히 소문 없이 애완하면서 끈기 있게 계승하며 누려왔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도 우리 고유의 수석미를 찾아내야겠다. 우리 민족성과 맞는 한국적인 향토의 구수한 흙냄새와 자연미의 추구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