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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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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우리 壽石歷史의 背景과 세갈래 흐름

  _ 고산 박철수 재공_ 우리 수석역사의 전통과 배경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때 돌을 애석하게 된 흐름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 흐름을 요약하면   ① 중국의 괴석을 주체로 영향을 받은 山水石 애석풍류 ②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배석신앙에 따른 자생적인 애석 열기   ③ 불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애석풍토   첫 번째 우리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권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여 오는 동안 우리 나름대로의 환경에 적응되는 고유한 영역을 키워왔다. 그러한 중에 중국의 괴석을 누리는 기풍이 우리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주로 태호석(太湖石), 영벽석(靈璧石)을 흠모하는 가운데 산수석을 누리는 심오한 경지가 중국의 완석에 그 전통의 근간을 두게 되었다.   500년전 기록인 인제(仁齊)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서두에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삐죽한 봉우리는 가파롭고 험하며, 낭떠러지와 깊은 구렁을 이루었는데, 은은히 구름과 우뢰를 품고 있는 듯한 모양을 가졌다.” 라는 산수석에 대한 묘사는 중국의 고전 기록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표현은 중국의 서책을 배우는 사이에 익힌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고궁인 비원 내 낙선제의 어느 우람한 정석(庭石)을 살펴보면 한 쪽에 ‘입옥비운(立玉飛雲)’이란 글이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뜻은 ‘구슬처럼 고귀하게 우뚝 솟아난 봉우리 위로 구름이 걸쳐 흘러간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역시 중국의 맥을 이어받은 산수석의 의미를 단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완석을 주로 인용한 글이 우리의 고전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특히 미원장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애석담들을 널리 인용한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기풍이 정립되어 왔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제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화로 비슷한 분 가운데에 돌을 갖다놓으면 물기를 봉우리 위까지 능히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더운 낮에도 마르지 않으며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기를 띄운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나라 옛날의 독특한 애석기풍을 세웠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런 돌을 ‘香石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라 설파한 바를 염두에 둔다면 오늘날 처럼 돌에 물을 뿜어주지 않더라도 분 바닥에 고인 물을 저절로 빨아올리는 돌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완석 기풍은 아직 중국의 고전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    수반에 앉힌 산수석의 감상은 물을 뿜어주고 나서 바라보는데에 그 극치가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은 수석은 그 색깔이 선명하게 돋아나오고 치밀한 질감과 윤택함도 살아나와 감상하는 맛이 훌륭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날의 취향은 한국만의 창의적인 애석기풍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석은 오랜 세월 사이에 養石이 되어야 참다워진다.   수석에서의 양석이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과 같으며, 우리의 덕성을 기르기 위한 養德에 비유할 수 있다. 돌은 본래 생명이 없지만 수석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정신으로 완상하고자 하는 것이 양석이다.    이러한 양석에 대해서도 인제 강희안은 이미 설파하고 있었다. 저절로 물기를 빨아올린 돌에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겨나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양석인 것이다. 이끼가 생겨남으로 경년(經年) 변화에 의해 저절로 스며 나오는 고색(古色)의 유현한 느낌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500년 전에 지적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토속적으로 자생한 애석의 색다른 기풍은 배석신앙(拜石信仰)에 의한 발흥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기고(奇古)하고 신비한 돌 앞에 엎드려 부귀를 염원하고 가문의 번영을 기구하는 등의 소원을 비는 의식이 우리 민족에게 강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고 본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마을 근처의 어떤 바위에 대한 신비성을 이야기하며 두려워하기도 하는 원시적인 배석신앙의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듯 배석신앙은 돌과 바위와의 친화력을 갖게 하여 진귀한 돌이라면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기풍이 일반 서민들 가운데에 퍼지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커다란 바위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누각과 같은 다락집 형상을 갖춘 돌, 인체와 닮은 돌 등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은 모두 신령한 것으로 받들며 숭배하였다.    신앙적(샤머니즘)으로 돌과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어느덧 어떤 바위에 대한 신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찬사도 보내는 과정에서 완석의 정서가 생겨난 것이다.   그 한 예로 민화에서 괴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애석의 정취가 상류사회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민층의 저변까지 폭넓게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애석이 자연발생적인 현상임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돌을 애완했던 자취가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치는 사이에 도교의 노장사상이 혼입되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어느 종교이든 낯선 고장에 정착하려면 그 풍토 환경에 영합하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노장적인 자연애가 강하게 나타나는 불교의 성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기에 괴석과 같은 자연미에의 상찬이 승려들에 의해 굳혀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당(唐)에 가서 화엄경을 배워온 신라의 승려 승전법사(勝詮法師)가 80개의 돌을 관속으로 삼아 그 돌들을 향해 불경을 개강했던 것은 우선 ‘돌’이라는 자연을 아꼈기 때문이다.   충무 앞바다의 통영군 욕지면 영화도에는 400년 전에 연화도인(蓮花道人)이 모셔놓은 ‘둥근 돌’이 있다.    이 역시 자연이라고 하는 돌을 애착하였다는 한 예가 된다. 이 전래석인 ‘둥근 돌’은 불교적인 의미를 다분히 품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돌은 오늘날의 승려들도 좋아하여 사찰에서 자주 발견되는 돌이다. ‘둥근 돌’은 모가 없이 완만하고, 어떤 사물의 번거로운 형상이 없어 오직 평안함만을 풍겨주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둥근 것에서 찾으려 한다.   둥근 것은 ‘완전’의 표상이다. ‘둥근 돌’을 바라보노라면 무아의 경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무경(無無境)의 선(禪)으로 몰입된다. 또한 대우주를 보는 넓고 너그러운 감개에 젖는다.    자연과의 친화에 의하여 승려들이 예부터 둥근 돌을 비롯한 괴석을 좋아했던 기풍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선(禪)과 각(覺)의 대상으로 완상하는 기풍이 대중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혀가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자연애의 기풍은 여느 민족과는 달리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 비록 인공을 가했더라도 그 흔적이 감춰진 순수 자연의 본래 상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들 과거의 애석 풍토가 중국의 태호석, 영벽석 등을 중심으로 미원장 등의 산수석 예찬이 주종을 이뤄 영향을 받아왔음은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환경과 풍토에 맞는 우리다운 애석기풍이 특색 있게 나타나 있음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장차 현대 수석의 방향도 이에 맞추어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 전래된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3년)에 중국으로부터 축산법(築山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이때부터가 우리 선인들이 정원을 석가산으로 자연축경을 꾸미면서 돌에 대한 매력과 흥미를 느껴 수석수집 취미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고려로 내려와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많은 풍류를 보고 목화씨를 담뱃대에 숨겨 온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이 애석하였는바 그 실증으로 경남 산청군에 소재하고 있는 선생의 사당(祠堂)에는 지금도 많은 괴석(怪石)과 기석(奇石)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명한 문인들과 승려들에 의하여 애완되어 왔다. 홍만선(洪万選)(1664~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수석의 이끼를 배양하는 방법과 석창포와 돌의 산지를 소개했다.    김영황(金永晃)의 친필로 된 <예석기(禮石記)>에 수석의 첨경 그리고 수석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김영황(金永晃)은 분성(盆城) 사람으로 자는 주향(周鄕), 호는 단계(丹溪)이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문하생이었다.    단계는 시서화에 능했고 가야금을 잘 타는 풍류인 이었다. 단계는 애석하게도 30세에 요절하였다 하니 어찌 그리 수명이 짧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단계의 글씨에서 추사가 애석해했던 자취가 뚜렷이 남아있다.    단계는 ‘해석연산(海石硯山)’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돌은 옛날에 궁중에서 진기하게 소장했던 유래석(由來石) 이었던 것이다. 이 돌이 당계의 손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기록하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김교각(지장보살), 다산, 완당, 초의대사 뿐만 아니라 문인묵객에서 궁중에 이르기까지 애석했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우리나라의 각계각층의 선비들이 그리고 더 아득한 선인들도 애석하여 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茶山 정약용(丁鏞)(1762~1863)이 말년에 강진으로 귀양 가서 스스로 탐석한 돌을 완석하였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돌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과 행적이 남아있다.    추사(秋史)가 쓴 <천하괴석(天下怪石)>, <수석노태지관(壽石老笞池?)>, <산수석(山水石)> 등 천하명필이 지금도 탁본이나 사본 그리고 서각으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얼마 후 강추금(姜秋琴)이 선인들의 전통을 이어 문방오우(文房五友)로서 돌을 애완하면서 ‘30년에 걸쳐 괴석을 모으니 책상머리에 무수한 명산들이 우뚝 솟았구나.’라고 하며 감격하였다.    옛 선비들이 무아의 경지에서 세월이 담긴 돌 하나를 문갑 위에 놓고 태초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풍류는 신선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었으며 이 기품을 사랑하여 문방(文房)의 제 오우五友)이자 제오군자(第五君子)로서 애석해 왔던 것이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오우가(五友歌)>에서 읊었듯이 이 수석(水石)과 송죽(松竹) 그리고 달의 다섯 친구면 지금도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일본고사에 의하면 수석이 우리나라부터 이웃나라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백제시대의 근륵(勤勒)이란 승려가 일본 수이꼬천황(推古天皇) 20년(612년) 영산석(靈山石)을 일본조정에 헌납한 것이 일본 수석의 효시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 애석의 값진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제(仁齊) 강희안(姜希顔)(1417~1464)의 <양화록(養花錄)>은 지금부터 약 5백 년 전의 기록임에도 괴석에 대한 감상과 연출기법 등을 상세히 적어 놓은 보배로운 책이다.    ‘괴석은 곧 굳은 덕을 지니고 있으며 참으로 이것은 군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라는 괴석 예찬도 아끼지 않았으며 세조 때의 서화가로 훌륭한 괴석도(怪石圖)도 많이 그렸다.  그의 「양화소록(養花小錄)」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장식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숨어있는 듯한 국화와 높은 품격을 지닌 매화와 더불어 난초의 상서롭게 풍기는 향기 등 여러 종품(種品)은 제각기 풍류와 운치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창포(菖蒲)는 홀로 세속에 초연하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차가운 지조가 있으며, 괴석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 항상 같이 하여 눈에 담고 마음으로 본받을 것으로서 모두 버릴 수 없는 감히 미치지 못할 고상한 형식이다. 그들이 지닌 바가 나의 덕이 되는 것이므로 정신적으로 유익하고 도움이 됨이 어찌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 뜻이 어찌 넓고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널다란 집에 보드라운 융단을 깔고 비취 구슬을 몸에 차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부르는 따위에만 마음과 눈이 어두워지는 행실은 충분히 엄준한 징벌을 받을 만하다.”   또한 우리의 옛 동양화에서 선조들이 남긴 허다한 괴석도(怪石圖)는 선비의 애석 자취를 넉넉히 반영해주고 있으며, 분(盆)에 올려놓은 괴석을 방안에 배치한 고화(古畵)도 발견되고 있다. 또 서민층에 널리 퍼져있던 민화 속에서도 애석하여온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이 돌의 운치를 귀히 여겨 아끼고 사랑한 격조 높은 피가 오늘날 우리들 몸속에서도 흐르는가 보다. 지금도 고궁에 가면 품위 있고 기품 있는 기석(奇石), 괴석(怪石)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창경궁(昌慶宮), 장서각(藏書閣) 앞, 창덕궁(昌德宮) 낙선제정당(樂善齊正堂) 뒤와 장락문(長樂門) 앞 등엔 돌 화분에 세워진 기석(奇石)들이 옛 사람들의 얼을 간직한 채 묵묵히 예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돌의 산지와 연대 그리고 유래 등을 기록한 문헌이 없어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궁중에서도 돌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으로 흐뭇함을 금치 못한다.   ‘돌의 맛, 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시인 조지훈은 못을 박기도 하였다.    추상석(抽象石)에 심취한 시인 박두진은 스스로 탐석한 돌에서 시상을 얻어 쓴 <수석열전(水石列傳)>이라는 돌 시집을 펴놓았다. 돌은 선비들의 애완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길흉을 점지해주는 영험한 암석으로 숭배하기도 하고 때로는 건축재로서, 석공예품으로서 다양하게 항상 우리 인간과 함께 인간의 곁에서 공존하였다.    선인의 슬기가 가득한 <채근담(菜根潭)>에서 말하기를,“풍취를 얻는다는 것은 많음에 있지 않다. 작은 못, 작은 돌 하나에도 고요한 산수의 경관이 담긴다. 빼어난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오막살이 초가에도 시원한 바람, 밝은 달이 있다.”  라고 했듯이 아주 작은 것에서 크고 풍요로운 것을 얻는 풍류가 곧 축경미의 극치로서 수석 취미의 보람을 갖게 한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수석 취미를 조용히 소문 없이 애완하면서 끈기 있게 계승하며 누려왔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도 우리 고유의 수석미를 찾아내야겠다. 우리 민족성과 맞는 한국적인 향토의 구수한 흙냄새와 자연미의 추구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겠다.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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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壽石의 始初되는 石假山 재조명

https://cafe.daum.net/gosanparkchulsoo/2muK/19      ((자세히 보기 !!)   -고산 박철수제공 -   石假山의 형성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것이 이상적이나 대부분 여러 개의 돌로 축조하고 수목을 심어 산의 모양을 갖추어 놓고 있다. 석가산 문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석가산의 기본이자 중심은 돌이라는 점과 三山五岳, 三神山, 巫山12峰 등으로 선계를 조성한 점이다. 주인공 돌로 조성된 선계는 方形이나 円形 위, 즉 天円地形의 상징적 체계이고, 이것이 오늘날 수반석 연출의 맥을 짚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당 안의 가산은 풍수지리에 의한 단순한 지세의 보완으로 조성하는 造山과는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長壽至樂의 상징적 공간이 선계이다. 이러한 공간을 가산으로 만든 것이 이미 4세기부터라 보인다. 평양의 동명왕릉 앞의 절터 후원에서 고구려 석가산이 발굴되었고,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에 조성된 궁남지에는 삼신산의 하나인 方丈山이 못 가운데 있다. 경주 안압지에는 못 가운데 삼신산이 있고, 동쪽 호안에는 무산12봉이 있다. 또한 남원의 광한루 방지에도 삼신산이 있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취를 내 몸 가까이 누리기 위하여 그 아름다움을 뜰에 축소하여 만들면 축경조원이 된다. 또한 수려한 산수의 경관과 흡사하게 만들면 석가산이 되는 것이다. 석가산을 만들기 위해 기암괴석을 자연스럽게 쌓아 조성하는 축경조원에서 출발한 것이 애석의 정취로 무르익었으며, 그 무르익음이 마침내 실내에서도 애완하며 감상할 수 있는 ‘수석의 세계’로 정착되었다. 수석의 시초는 석가산에서부터 출발하였으므로 수석의 원조는 석가산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자연을 가장 친근한 벗으로 사랑하고 자연의 분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항상 갖게 마련이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염원은 마침내 자연과 인간과의 혼연일체에 도달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생활에 따라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숙명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야외에 나가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수려한 풍경을 언제나 내 몸 곁에서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솟아올라 마침내 좋은 착상이 떠오를 것이다. 야외의 산자수명한 경관을 내 집 뜰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기화요초를 뜰 안에 심어놓고 운치 있는 기암괴석을 뜰 안에 옮겨놓고 푸른 나무 마당가에 심어놓으면 대자연의 포근한 품속에 안긴 것 같다.   그러나 태산준령이 뻗어나 구름이 머물다 가는 웅대한 대자연의 산수경관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럴 때 우리 조상의 선인들은 ‘축경(縮景)’이라는 슬기를 창안하게 되었다. 태산의 산줄기와 깊은 계곡을 본떠서 그 웅대하고 거대한 경관을 작게 축소하여 뜰 한쪽에 꾸며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산(石假山) 또는 조산(造山), 축산(築山)이다. 이것을 동양적인 조원(造園)이라고 한다. 이 축경의 조원은 아주 먼 고래로부터 발달되어 전해 내려와 동양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풍류를 돋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괴하게 생긴 크고 작은 돌들을 마당가에 적절히 배열해서 어떤 웅장한 명산의 상징으로 삼는 석가산. 또한 흙무덤을 쌓고 여기에 나무와 풀을 심어놓아 전설적인 명산이나 실재하는 명산(名山)을 자그맣게 본떠서 상징적으로 조성하는 축산의 기교를 부렸다. 넓은 뜰 한가운데에 수려하고 엄준한 산을 만든 곳에 계류와 호수를 조성했다.   기괴하고 운치 있는 바위를 실어다가 노송 밑에 앉혔다. 이렇게 정원을 꾸미고 나니 모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한 곳에 집약된 축경을 이루어놓은 셈이다. 조산을 꾸밀 때 석웅황(石雄黃: 염료, 화학, 채료로 쓰이는 누런 덩어리)과 흙을 배합하여 산 모양을 만들어서 뱀과 같은 흉물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염초(焰硝: 한방약재, 화약의 원료)를 사용하여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구름 기운이 생기어 조산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감돌게 하여 안개와 구름 속에 우뚝 솟은 웅장한 산용(山容)을 나타내게 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자연경 속에 파묻혀 누리는 풍류를 뜰 안에서 또는 안방에서 바깥뜰을 내다보며 언제나 즐길 수 있게끔 석가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경지를 다시금 안방으로 이끌어 들인 것이 바로 수석(壽石)이다. 석가산도 축경(縮景)이오, 수석(壽石)도 축경세계라는 것은 공통이며, 그 누리는 경지도 매 한가지이지만 그 형식이 다른 것이다. 다만, 석가산은 여러 개의 돌을 포개고 쌓아서 어떤 수려한 산수 경을 조성하였으며, 그 장소는 뜰 어느 한쪽이었다. 즉 풍경식 정원을 가꾸어 놓는 기교이다. 또 그 여러 덩어리의 크고 작은 돌들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작은 나무나 풀을 곁들이는 동시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폭포와 호수를 조성하여 실경(實景)의 맛을 돋우는 것이다.   석가산은 갖가지 소재를 이용할 수 있으며 돌도 아주 거대한 것, 또 다량으로 쓰이는 것이지만, 수석은 오직 한 덩어리로써 안방에 들여놓을만한 작은 것이어야 하는 특석이 있다.뜰에다 축경 조원을 이룩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돌들이 필요한데, 이윽고 실어 날아온 울퉁불퉁한 돌들을 매만지다가 인간의 예지는 놀랍고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열두 봉우리의 웅대한 산악 경치를 자그마하게 축산(築山)하면서, 문득 작은 돌 한 덩어리에서도 그와 같은 자연경치를 바라볼 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 일컬어지는 수석의 시초가 된다.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어서 웅대한 자연 산악경치를 마당에 조성하는 것만으로써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한 경관을 다시 안방으로 모셔 놓고서 편안히 앉아 주야로 금수강산을 다 구경하고자 했다. 방안에 배치해 두는 것이니. 석가산처럼 큰 돌을 놓든지 또 여러 덩어리를 조합해 둘 공간이 좁으므로, 이 돌은 반드시 작은 것이어야 하고 단 한 덩어리로써 이룩되어 있는 것이어야만 소용되었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수석(壽石)이 요구하는 형식이 확연하게 정립되어졌던 것이다. 뜰에 조성하는 석가산은 그만치 규모가 큰 편이지만, 수석(壽石)은 작은 하나의 돌이기 때문에 범위가 매우 좁아서, 수석쪽에 허구성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수석에 있어서 실경에 가까운 형태도 다소 있기는 하더라도 석가산보다는 구체적인 형상이 생략되어진 요소가 더욱 다분하여, 우리의 상상력은 보다 크고 넓고 깊어져야 한다. 수석에서는 실오라기 같은 작은 주름에서도 매우 깊은 골짜기와 쏟아지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콩 알 만하게 작은 봉이 하나 솟았다고 할 때 거대한 준령의 봉우리로 여기면서, 그 준령봉이 본래 지니고 있을 보이지 않는 온갖 산세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다 낱낱이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산은 수석에 비해 어느 정도의 실상(實像)은 여실하게 나타나게 되지만, 수석에서는 허상(虛像)이 매우 강하다는 특징을 품고 있다. 이 심오한 허상을 실상으로 느껴 감동하려면 수석으로 향하는 정서가 매우 더 성숙되어져야 한다. 사실 허는 실을 담는 그릇이다. 이 허가 있기 때문에 수석 감상의 깊은 묘취가 무한히 발현한다.    하늘이 위에 덮고 땅이 아래에서 받쳐주고 있으니, 그 사이가 비어(虛)있지 않으면 모든 형상(事物)을 포용(實)할 수 없으며, 또 河海가 비어 있지 않으면 온갖 냇물을 받아들일 수 없듯이, 사실적인 경(景)을 느낄 수 없는 허(虛)한 부분이 있음으로써, 수석감상은 무한하게 갖가지로 꿈속의 아름다움을 찾아 펼쳐져 나가는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石假山과 제자 朴晋慶의 石假山說 어떤 사람이 산을 가리키며 묻기를 “산이냐?” 하기에 “네, 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돌을 가리켜 묻기를 “돌이냐?” 하기에 “네, 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산을 돌이라 해도 되느냐?” 하기에 “안 되지요.” 했더니 다시 묻기를 “돌을 산이라 해도 되느냐?” 라고 묻기에   “그것은 됩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돌은 흙의 情(만물의 생성 원기)이며 산의 骨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흙이 없는 산은 돌이라 할 것이며, 돌이 있어야 곧 산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산 모양의 돌을 가산이라 이름붙인 것은 寓想之意(자신의 생각을 물건에 빗대어 나타내는 것)가 심오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산은 이 세상에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큰 것이고, 사람은 가장 영적인 존재입니다.   산 가운데는 昆崙山(곤륜산: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데, 이는 곧 이 세상 산의 祖宗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성인이 있습니다. 성인은 곧 사람들의 인격의 지표라 할 것입니다.   산은 다 보았다고 하려면 반드시 곤륜산까지 본 뒤에 산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사람들을 다 보았다고 하려면 반드시 성인을 보고 나서 사람을 다 보았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곤륜산은 이 세상에 많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것이며, 성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곤륜산은 천하의 서북쪽 끝에 있는데(지금의 중국 서방에 있는 靈山) 우리나라에서 수천만 리 떨어져 있고, 성인도 아주 먼 옛날 요, 순(堯와 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인)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수천 년이 되었습니다.   곤륜산의 형세도 극동의 바다 끝에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산을 보면서 그 생김새를 비추어 보고 그 높음과 커다람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보는데 있어 이런 방법으로 본다면 멀리 있는 산을 꼭 찾아가지 않더라도 가까이 있는 돌을 두고 산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의 이치는 어느 하나를 완전히 깨달으면 작은 것을 보고 높은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먼 곳에 가지 않고도 가까이 있는 같은 종류의 물건에서 멀리 있는 진짜 물건의 심오함과 심원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은 석가산을 천리 밖에서 수집하여 들고 와서 눈앞에 두고 감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樂山(산을 즐기는 것)의 한 술책인 것이다. 선생은 그 전부터 괴석을 하나 구하여 책상에 올려놓고 곤륜산의 위대함을 상상하고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돌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가던 도중에 노독으로 앓게 되어 중간에서 사직상소하여 돌아서서 남쪽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 월악산을 지나다가 경석 한 개를 얻게 되었다. 아마도 하늘이 선생에게 그렇게 바라던 경석을 보상한 것이 아닐까?   이 돌을 보면 奇妙한 험준한 산 모양인데, 우뚝한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깊이 파인 구렁이 있으며, 또 휑하게 뚫린 동굴이 있다. 그런가 하면 뚫리지 않은 굴도 있다.   돌의 크기는 한 자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둘레는 두어 자가 된다. 바위는 낭떠러지를 이루고 깊숙한 굴이 많아서 두어 치 크기의 소나무 한 그루를 盤谷의 낭떠러지에 심고 이끼를 붙여 촉촉하게 하였다. 대문 밖에 나가지 않고 책상의 수반 위에서도 嶽山의 중후함과 불변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높고 탁월한 형상까지 느낄 수 있다.   비온 뒤에 촉촉한 모습을 조용히 감상하면 내 눈은 더욱 돌에 집착하여 움직이지 않고, 마음에서는 비와 구름이 일어 더 흥겨워진다. 그리하여 실로 이 돌은 기쁘기 그지없게 하다가 비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감정을 산과 닮은 저 경석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데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아무라도 이 돌을 보면 만 리 밖에 있는 높은 산의 풍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묵상하여 깊이 관찰하면 格物致知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이와 같은 마음으로 가산을 보기 때문에 이 돌은 단순한 物 이 아니다. 가까이 있는 경석을 산으로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산을 찾아 즐길 것이며, 사물을 보는데 있어 이치로 볼 것이지 형상을 보는데 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때문에 모든 사물은 스스로 추리하여 보면서 적은 것을 크게 확대하고 큰 것을 작게 축소할 수 있어야 한다.   대문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온 천지를 노닐 수 있어야 진짜 노닐었다 할 것이다. 세속을 초월한 도인들이 노니는 세계는 속세를 벗어나서 외형을 초월하여 노니는 것이다.   선생은 “마음을 테두리 안에 묶어두고 大觀(사물의 도리를 충분히 꿰뚫어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하면 그것을 볼 수 없으며, 대유를 함에 있어서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노닐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보았다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술법으로 석가산을 본다면 어찌 보았다 할 것인가.” 라고 하셨다.    假山을 眞山으로 보는 것은 선생께서 산을 보는 방법이다. 반드시 크고 높고 험악한 산에 등반하지 않고도 산을 볼 수 있으며, 천하를 아주 작게 줄인 마음으로 볼 때에는 南嶽(지리산)을 한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고, 마음을 飛越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 못난 제자도 감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제자가 마부를 재촉하여 玉山(경북 구미시 인동)에 계시는 선생님을 찾아 마루 밑에서 배알하였는데 그때 마루방에 있는 이 수석을 보았는바 그 때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깎아지른 험악한 봉우리를 보면서 나의 기상을 절벽처럼 곧추세워야 하겠다고 다짐했고, 뾰족하게 모난 봉우리를 보면서 나의 모난 마음을 깎고 도려내어 부드럽게 다듬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돌의 견고하고 확실한 질을 보고 나 자신의 덕의 터전을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으며, 봉우리의 준엄함을 보고 인을 쌓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돌을 산으로 보고, 산을 대인으로 보면서 돌의 형질이 아무리 강하여도 그 장점을 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생께서 이 훌륭한 경석을 얻게 된 것은 하늘이 선물한 것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돌은 산의 氣이며 核이다. 그런데 저 돌은 수렁 속에 매몰되어 흙과 엉켜 수억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산의 형상과 딱딱한 질을 얻었으며, 또 수많은 세월 동안 모래와 자갈밭에 묻혀 있다가 마침내 선생님에게 발견되었다.   이 돌의 근본은 흙이다. 흙이 변하여 돌이 되었으며, 또 돌이 산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흙이 변하여 돌이 되는 이치를 모르겠고, 어떤 물질이 변하여 돌이 되고 산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라도 천지간에 있는 만물의 物理에 대해서 잘 알기는 어렵다. 또 조물주의 조화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조물주가 돌로는 못쓴다고 폐기하지 않았는데 그 돌을 관상하는 물건으로 사용할 수 있다하여 선생께서는 사람을 시켜 수집하여 집으로 가져왔다.   선생은 이 돌을 얻은 뒤 아침저녁으로 상대하여 보고 있는데 이런 돌은 이 세상에 둘도 없으며, 사람이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徐居正의「假山記」와姜希孟의「假山讚」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가산기(假山記)』를 살펴보자면 창녕(昌寧) 성후(成侯)는 본성이 담박하여 남산의 기슭에 살고 있으면서, 괴이한 형상의 돌들을 모아 뜰에 배치하여 가산(假山)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을 깊이 있게 구경하고 난 서거정은 다음처럼 말했다.     “… 나 거정(居正)은 일찍이 그 집의 뜰을 찾아가서 구경하였다. 가산의 높이는 한 길 남짓하고 그 밑바닥 주위는 여러 아름인데, 산의 기세가 좌우로 연락되어 있었다. 뾰족하여 봉우리가 되고 우뚝하여 잿마루가 되고 움푹해서 구렁이 되고, 앙상해서 기슭이 되며, 나직했다 도로 치솟으며, 푸른빛이 얽히고 흰 빛이 둘러서 갖가지 형상이 다 나타나 있다.   또 물이 쏟아져서 폭포도 되고 냇물도 되어 못도 되며, 못의 길이와 넓이는 역시 두어 자에 지나지 않는데, 물이 맑고 모래가 희어 머리칼을 헤일 수 있다.   아, 산이 우뚝 치솟은 것과 물이 넘실넘실 흐르는 것이 몇 걸음이나 몇 길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도 형산 여산 태산 화산(중국의 명산들)의 광경이 일일이 나타나며, 또 동정호 팽령호(중국의 유명한 호수)의 경치가 다 나타나니, 나는 조물주가 지맥(地脈)을 줄여 감추어 뒀던 것을 드러내어서 황홀하게 여기에다 옮겨 놓은 것이 아닌 가 의심하였다.”     뜰 한 쪽에 만들어 놓은 가산의 자그마한 경치에서 웅장한 광경을 바라보는 탄복스러운 감동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가산의 주인은 말하기를   “… 지금 나는 앉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지팡이와 신발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호산(湖山)과 방불한 경치가 보기에 좋으며 마음에 맞으니, 일을 좋아한다는 핀잔쯤이야 어쩔 수 없다.” 라고 흡족하게 강조한다. 서거정(徐居正)은 이 가산의 정취를 깊이 감상하고 나서 이렇게 또 기록하였다.   “… 사람이 어떤 물을 좋아하는 데도 내외의 구분이 있으니, 만약 겉으로 형체나 빛깔에서만 찾으려 들고 안으로 숨은 성정(性情)의 천진(天眞)에서 찾지 않으면 한갓 좋아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이오, 그 좋아하는 실속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치가로 문장에 뛰어난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가산(假山) 찬(讚)」을 볼 것 같으면,   “사람은 더 높고 큰 산을 오르고자 하고, 보다 깊고 넓은 물을 구경하고자 하지만 지역이 구분되고 다리 힘이 빠지므로 아무리 날고 뛰더라도 그 웅장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으며, 집 뜰을 벗어나가지 않고 산림과 강해(江海)의 취미를 거두어들이고자 작은 것으로 인하여 큰 것을 추측하며 가(假)를 진(眞)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석가산의 정의를 피력하고 있다.   石假山을 만든 조선초기의 애석인 成任 成俔 형제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석가산(石假山)을 만든 성현(成俔)은 이조 초기의 학자로 애석가였다. 형인 성임(成任)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명신으로 이조 초기의 애석가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성현은 맏형 성임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갔을 때 기행시(紀行詩) 관광록(觀光錄)을 지어 중국학자들이 탄복할 만큼 뛰어난 학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명나라의 애석가인 이공동(李空洞: 1472~1509)과 교유하게 되어 애석 취미에 몰입하게 되었다.   1474년 성균관직강으로 임명되어 성종 5년 한명회를 따라 또 다시 두 번에 걸친 중국 연경 행은 이공동과의 교유를 드넓게 쌓아 그 취미는 드디어 석가산(石假山)을 만들기까지 하여 절예(絶藝)한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 석가산은 성임, 성현 두 형제가 자연미 축경에 다 같은 공통된 취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형인 성임은 일찍이 자기 집 뒤에 기이한 돌을 모아 산을 만들고 이름을 석가산이라 하였다. 석가산기(石假山記)에 의하면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바위 위에 장막을 둘렀던 우묵한 곳이 있다.   바위가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으며 분류(分流)가 어지러이 쏟아지는데 청천(晴天)의 우뢰처럼 귀를 시끄럽게 했다.   물은 맑고 돌은 희어 선경이 완연하니 와서 노는 의관자(衣冠者)들이 그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성현은 집 뒤 빈 땅에 돌을 모아 산을 만들어 높이가 근 한길이나 되고 뭇 봉우리가 높이 솟아 중앙의 봉우리를 보고 절을 하는 것 같으며 뭇 골짜기는 겹겹이 싸여 동부(洞府)가 되어 있고 옆 봉우리와 가로놓인 산마루가 면면히 겹겹이 쌓여 기이한 현상을 하여 마치 삼신산(三神山), 오악산(五岳山)을 하나로 모아 만든 것 같았다.   석가산의 오묘함을 찬탄한「石假山賦」 “어떤 대인선생이 천지를 오막집으로 삼고 六合(우주 ? 동서남북)을 병풍삼고, 연기 구름을 기운으로 삼고, 江海를 회포삼고, 솔솔 부는 바람소리는 곧 나의 거문고, 피는 꽃과 지저귀는 새가 곧 나의 하인들.   기묘한 의장으로 울툭불툭한 산 뼈(山骨)를 벗겨다가 문득 한 이경을 베풀어 놓으니 어찌 東西를 분별치 못하겠네. 그 모양이 우뚝 높직, 깎아지르듯, 꿈틀꿈틀, 가파르매 뾰족뾰족, 민틋하여 둥그스럼, 혹 서린 듯 혹 쌓인 듯….   어두침침한 계곡, 깨끗이 솟은 봉우리들, 휑하게 뚫린 골짜기, 빙 둘린 돌담, 알록달록한 무늬, 사이에는 푸른 빛 붉은 빛, 백화가 향기로이 핀 듯, 온갖 풀 우거져 엄방진 듯, 해 오르면 더 빛나고, 달이 뜨면 영롱하고, 서리 치면 더 알씬하고, 비온 뒤엔 더 산뜻하다. 뽀얀 연기 뭉게뭉게 허리를 감쌌으니 마치 구름이 날아가는 용을 따르는 듯, 휘휘 떼 지어 날며 오락가락 꽃 찾는 양은 학이 소나무에 깃들인 듯….   오늘 여기 보는 것은 참으로 황홀 난측이오. 눈이 아찔 귀가 먹먹하니, 모를지어다. 음양 조화가 어린애 소꿉질을 벌려 사람을 놀림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 휘몰아치는 밤에 도깨비와 귀신들이 하늘의 도끼와 달의 자귀를 도둑 해다가 이렇듯이 깎아 만든 것인가. 어찌 이리도 기괴 변화가 무쌍하여 사람을 놀래키는가….”   이렇게, 축경(縮景)의 묘취에 젖어 감탄해 마지않았다. 『석가산부』에서 이 축경의 뜻에 대하여 그 주인(大人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로써 보면, 조막만한 돌이 대악(岱嶽)의 큰 산이 되고, 한 웅 큼의 물이 하해(河海)의 큰 물결이 되나니… 지금, 나는 뿌옇고 파란 雲山의 천만(千萬)형상을 앉아 누워 방안에서 마주 대하니, 나 혼자 즐기는 이 즐거움은 북과 종을 치지 않는 북과 종이라. 아, 저 고관대작으로 홍진(紅塵)에 분주한 무리들, 부산하기가 식혜 독의 꿈틀 벌레 같구나.”   石假山 形式과 組成方法 석가산이라는 뜻은 정원의 한가운데에나 또는 한쪽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한 산의 경관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즉 돌을 모아 쌓아서 작게 만든 산. 이것을 가산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이 석가산에 대한 관심은 고래로부터 전통적으로 흘러 내려와 많은 고전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석가산은 한마디로 縮景세계라고 할 수 있다.   축경은 동양의 자연관과 그 미의 철학을 대표하는 독특한 경지이다.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 가까이에서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 경관을 자신의 뜰 안에 조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한 곳에 집약된 축경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뜰의 축경보다 더 아기자기한 산수석과 盆景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원대한 경관을 작게 축소시켜서 보는 멋과 아주 작은데서 넓은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맛은 대단히 심오한 미의식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분신이 되고자 하는 역동이 자연을 더욱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축경세계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 석가산은 암석의 운치를 곁들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산에 비하여 바위의 정감을 간직하고 있다.     석가산의 조원 양식을 취하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수석미에 대하여 세련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커다란 바위와 한 덩어리의 작은 돌이 아무리 몽돌일지라도 그 깊은 영상의 세계와 감춰진 의미를 감지하는 마음가짐과 오형의 美點을 아는 심미안을 터득해야 한다. 그런 후에 석조의 테크닉을 배울 수 있다.   석가산은 모두 석조로서 조성되는 양식이다. 먼저 암석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쌓고 배열하는 것이다. 장시간의 노고를 거듭하여, 결국 손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서서히 이루어져야 참됨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기쁨과 즐거움에 의하여 조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을 누리기 위한 작업이어야 취미조원의 진미가 있다.     석조의 형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인공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석조의 형식을 익히려면 무엇보다도 자연암석의 자태를 면밀히 관찰하여야 한다. 한 들판에 놓인 바위. 정상에 앉은 바위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놓여질 자리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관찰하고 배워서 한정된 작은 뜰에 석조를 꾸며야 한다 (제공)고산 박철수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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